3년 전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내면서 이 책이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과 세상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썼었다. 책을 낸 직후,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줬다. 기뻤다. 나의 정체성이 이 세상에 온전히 받아들여진 것 같아 행복했다. 그러나 그만으로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나처럼(또는 나보다 훨씬)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과 세상을 잇는 데엔 이르지 못했다.
계기는 몇달 뒤 우연히 찾아왔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언론 <마인드포스트>에서 인터뷰 요청이 온 것이었다.
마음을 걷다.
나는 당시 이 언론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당사자 단체나 커뮤니티, 가족 모임, 정신장애인들을 옭아매었던 법과 제도에 무지한 상태였다. 물론 정신질환에 사회적 편견이 심각하다, 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족과 친구, 동료들은 대체로 나의 병을 이해해줬으므로 내가 직접 그런 차별에 노출돼 심한 고통을 받았던 건 아니었다.
<마인드포스트>에서 직접 취재도 하고 편집도 하고 데스킹도 한다는 박종언 기자로부터 정중한 인터뷰 요청을 받곤 이내 응했다.
여름날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이뤄진 인터뷰는 사실 녹록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질문, 또는 내가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엄청난 비극으로 끝난 20대의 연애에 대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아 책에선 슬쩍 넘어갔는데, 박 기자는 자꾸 그 점을 캐물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처우와 강제입원 등 제도의 문제에 대한 물음도 쏟아졌다. 깨달았다. 내가 이전에 했던 인터뷰는 중증 정신질환을 앓았던(앓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구나. 이 인터뷰가 ‘진짜’구나.
이후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연재 인터뷰를 눈여겨봤다. 그의 질문은 직설적이기도 하고 다소 관념적이기도 했다. 쉽게 답하기 힘든 어려운 질문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환우들, 가족과 전문가들의 진심을 척척 낚아냈다. 아마도 인터뷰이들은 조현병 당사자인 박 기자에게 경계심을 누그러뜨렸을 것이며,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정신질환을 이해하려는 그의 진지한 태도에 감화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는 이웃과 공동체가 간절했던 경험을 공유했을 터이다. ‘진짜’ 인터뷰였다.
인터뷰 20편이 묶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따끈따끈한 신간을 펼쳐보니 각자 놀라운 성찰과 곡진한 삶이 녹아 있었다.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아들과 함께 야간대학 사회복지학과를 함께 다닌 부모, 조현병을 앓으며 10년 동안 마음 속 한 사람만을 위해 그림을 그린 화가이자 목수, 시력을 잃고 ‘그럼에도’ 어둠 속에 한가닥 숨은 빛을 찾아내려는 정신과 의사, 당사자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하는 신학생…. 투병과 돌봄, 치유의 이야기 속엔 치료 및 재활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어떤 국가적 지원이 필요한지, 환자와 가족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도 빼곡했다.
20명의 다양한 인터뷰를 관통하는 열쇳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이 삶의 구체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즉 치유와 자립의 문제였다. 하지만 치유와 자립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서기로 가능했다.
문학으로 고통을 치유하는 박목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둘이서 사랑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노력해서 나만 회복하면 끝이 아니라 아픔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고 무엇을 함께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보는 게 사랑의 시작이에요.” 문학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서로가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게 문학이 할 수 있는 어떤 게 아닐까 싶어요.”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쓴 삐삐언니가 매달 첫째 주에 <마인드포스트> 독자들을 만납니다. 조울병과 함께한 오랜 여정에서 유익한 정보와 따뜻한 위로로 힘을 준 책들을 소개합니다.
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