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은 생존의 언어였다"... AI의 위협과 독박 육아, 트라우마 속에 갇힌 정신장애인의 숨겨진 고통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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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은 생존의 언어였다"... AI의 위협과 독박 육아, 트라우마 속에 갇힌 정신장애인의 숨겨진 고통을 묻…

발라드 0 9 14:26

정신장애인의 삶을 옥죄는 '보이지 않는 짐'

2026년 최신 연구들이 밝혀낸 정신증 당사자의 숨겨진 고통과 사회적 책임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은 일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과 마주하곤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 이면에는 급변하는 기술 환경, 독박 육아의 고립감, 그리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얽히고설켜 있다. 최근 발표된 세 건의 외신 연구는 기술, 트라우마, 사회적 압력이 어떻게 정신증(psychosis)을 겪는 이들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는 개인의 '증상'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구조적 과제'임을 시사한다.

 

AI 챗봇, 친구인가 적인가: 'AI 정신증'의 등장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누군가에게는 편의를 제공하지만, 정신적 취약성을 가진 이들에게는 새로운 위협이 되고 있다. JMIR Mental Health에 발표된 연구는 'AI 정신증(AI Psychosis)'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AI 챗봇이 정신증적 경험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음을 경고했다. 몬트리올 대학교의 알렉산더 휴돈과 엠마누엘 스팁 연구팀은 스트레스-취약성 모델을 통해 이 현상을 분석했다.

 

연구팀은 "AI 챗봇은 망상적 사고를 탐닉하고 강화할 수 있는, 새롭고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스트레스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인간 상담가는 내담자의 비합리적인 사고를 교정하려 노력하지만, AI는 사용자의 감정과 믿음을 비판 없이 그대로 거울처럼 비춘다. 이는 초기 정신증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기 참조적 사고, 즉 평범한 사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증상을 강화할 위험이 있다.

 

특히 직업 현장에서 AI 사용이 필수가 되어가는 현실은 당사자들에게 피할 수 없는 위험 요인이 된다. 저자들은 "AI 챗봇 알고리즘은 안전보다는 사용자의 참여(engagement)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들은 "현실 검증을 돕는 안전장치 마련과 AI와 정신의학에 관련된 윤리적 가이드라인 제정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기술이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특히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디지털 안전망이 절실한 시점이다.

 

고립된 육아: "나쁜 부모가 아니라, 지친 부모입니다"

정신장애를 가진 부모들이 겪는 육아의 어려움은 단순히 양육 기술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의 한나 콜린스 연구팀이 '심리학과 심리치료' 저널에 발표한 연구는 정신증을 경험한 부모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에 주목했다. 연구 결과, 정신증 경험이 있는 부모와 그렇지 않은 부모 모두 아이의 감정을 존중하고 규칙을 세우는 '긍정적 권위 있는 양육'을 지향했다. 그러나 실천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확연히 달랐다.

 

연구팀은 "정신증을 경험한 부모들은 압도감을 느끼는 결과로 바람직하지 않은 양육 전략을 보고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고 분석했다. 이는 당사자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가족의 지원 부재와 사회적 고립, 그리고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 등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서 기인한다. 죄책감은 이들의 정신건강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저자들은 "정신증 경험이 있는 부모들은 자신의 정신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홀로 육아를 감당하거나 가족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등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 요인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는 이들을 '위험한 부모'로 낙인찍기보다, 정서 조절과 자기 효능감을 높일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육아는 개인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망상은 트라우마를 견디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정신증을 뇌의 생물학적 고장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도전하는 연구도 주목된다. 뉴욕 주립대 다운스테이트 메디컬 센터의 마이클 가렛 박사는 정신증을 근본적으로 '트라우마 관련 현상'으로 재정의했다. 그는 생물학적 모델보다 정신분석학적, 트라우마 정보적 접근이 정신증 이해에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가렛 박사는 "뇌의 이상이 정신증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가 뇌의 이상과 정신증 모두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의 학대 경험이 뇌의 특정 부분에 손상을 입히고, 이것이 환청이나 망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망상은 트라우마를 상징적으로 재경험하는 동시에, 결핍된 심리적 욕구를 충족하려는 시도라고 해석했다.

 

가렛 박사는 친부에게 성추행을 당했으나 모친에게 외면받았던 한 여성의 사례를 들었다. 그녀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지시로 이웃의 소아성애자 조직을 소탕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가렛 박사는 "대통령과 영부인과 함께 일한다는 망상은 돌봐주는 부모상에 대한 심리적 욕구를 채워주는 동시에, 그녀를 무력한 피해자가 아닌 문제와 싸우는 주체로 위치시킨다"고 설명했다. 즉, 망상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덜 압도적인 방식으로 기억하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숨겨진 짐을 함께 나누는 사회로

이번에 소개된 세 편의 연구는 정신장애인이 겪는 고통의 본질이 개인의 결함이 아닌,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 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리처드 시어스 심리학 교수는 "정신증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도전과 더불어 트라우마라는 짐까지 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AI라는 새로운 기술적 위협, 고립된 육아 환경,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트라우마. 이 모든 것은 당사자가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거운 '숨겨진 짐'들이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들의 증상을 억누르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짊어진 짐의 무게를 인식하고 덜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복이자 인권 옹호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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